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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아닌 '병'… 게으름 아닌 호르몬 문제 기면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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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2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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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 때문에 자꾸 조는 걸 환자의 의지박약 탓이라 할 순 없다. 그럼에도 아직 수많은 기면병 환자가 '게으른 사람'이란 오해를 받는다. 서울대병원 신경과 정기영 교수(대한수면연구학회 회장)는 기면증을 기면병이라 불러야 한다고 했다. 이 둘의 차이는 크다. 기면증은 단순히 낮에 자꾸 조는 '증상'을 말하지만, 기면병은 이 증상이 병 때문임을 분명히 밝히는 말이라서다.

◇각성 호르몬 부족… '수면'과 각성'의 경계 흐려지는 병
기면병이 있으면 잠이 일상을 불쑥불쑥 '침범'한다. 타인과 대화하다가도 자신도 모르게 잠들기 일쑤다. 전날 밤에 충분히 자도 그렇다. 애초에 노력으로 쫓을 수 있는 잠이 아니다. 호르몬 문제기 때문이다. 우리 몸은 다양한 방식으로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한다. 각성 상태를 유지하는 '오렉신'이란 호르몬이 그중 하나다. 기면병 환자들은 이 호르몬이 분비되지 않는다. 깬 상태를 유지할 방법이 남들보다 적으니 각성 상태도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정기영 교수는 "수면과 각성을 시소의 양끝에 비유하자면, 일반인들은 수면과 각성 주기에 따라 시소가 한쪽으로 완전히 기운다"며 "기면병 환자는 시소가 어느 쪽으로도 완전히 기울지 못하고 흔들거리는 상태"라고 말했다.



기면병 환자들은 오렉신을 분비하는 시상하부 세포가 망가져 있다. 현재 의학계에선 인체 면역체계가 오작동해 오렉신 분비 세포를 공격하는 게 원인이라고 추정한다. 기면병을 일종의 자가면역질환으로 보는 것이다. 정기영 교수는 "인체의 어떤 유전자가 기면병을 일으키는지 아직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특정 백혈구 유형을 가진 사람들은 기면병이 더 잘 생기는 편"이라며 "또 신종플루 등 감염병이 돌고 난 후에 기면병 환자가 증가하는 것을 봐선, 몸이 바이러스에 대항하려 만들어낸 항체가 오렉신 분비 세포를 공격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기면병 환자 70~80%는 주간 졸림 외에도 '탈력 발작'이란 증상을 경험한다. 몸의 근육에서 별안간 힘이 빠지며 동작을 멈칫하게 되는 증상이다. 서 있다가 무릎이 약간 꺾이는 정도에서 그칠 때도 있지만, 심하면 바닥에 쓰러지기도 한다. 기절하는 게 아니라 몸의 힘만 풀리는 것이라 의식은 그대로다. 탈력 발작 역시 각성 상태가 제대로 유지되지 않아 발생한다. 렘수면 상태에 있을 땐 근육이 마비되는데, 이 증상이 깨어 있는 상태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기면병 환자는 각성 상태만큼이나 수면 상태도 불안정하다. 고대안산병원 신경과 김현진 교수는 "기면병 환자들은 잠이 들거나 깰 때 생생한 환각을 보거나, 가위에 자주 눌리곤 한다"며 "수면장애 탓에 잠에 제대로 들지 못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근본적 치료제 없지만, '각성제' 복용하면 일상생활 가능
인슐린 분비량이 부족하거나 있어도 제 기능을 못 하면 당뇨병이 생긴다. 그래서 당뇨병을 치료할 땐 환자의 몸에 인슐린을 넣어준다. 이처럼 기면병 환자에게 부족한 오렉신을 직접 넣어주면 좋겠지만, 아직은 불가능하다. 몸 혈관에 오렉신을 주사하면 오렉신이 뇌에 도달해 작용하기 전에 혈액에서 다 분해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뇌에 직접 바늘을 꽂아서 오렉신을 주사할 순 없는 노릇이다. 정기영 교수는 "오렉신을 뇌까지 전달할 기술이 있다면 기면병을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 있겠지만, 이런 기술이 개발되긴 어려워 보인다"고 말했다.

오렉신을 직접 주입할 순 없어도, 다른 방법으로 주간 졸음을 완화할 수 있다. 중추신경계를 각성시켜 몸을 억지로 깨우는 것이다. 병의 원인을 해결하는 방법은 아니지만 꽤 효과가 좋은 편이다. 정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영화 한 편을 다 못 보던 환자가 약을 복용한 후 영화 한 편을 다 볼 수 있"게 될 정도다. 다만, 약효가 평생 가는 게 아니므로 정상 생활을 하려면 약을 매일 먹어야 한다.



기면병 환자들은 보통 세팔론의 '프로비질(성분명 모다피닐)' '누비질(아모다피닐)'을 1차적으로 처방받는다. 신경계의 도파민 농도를 높여서 몸을 각성시키는 약이다. 카페인보다 각성 효과가 훨씬 세지만, 의존성이 없어 중독될 우려가 없다. 바이오프로젝트 파마의 '와킥스(피톨리산트)'도 1차 치료제로 쓰인다. 프로비질·누비질과 달리, 각성 호르몬 중 히스타민의 농도를 주로 높인다. 정 교수는 "셋의 약효는 거의 비슷비슷하다"며 "다만, 프로비질·누비질은 주간 졸림 증상만 완화할 수 있는데, 와킥스는 탈력 발작에도 어느 정도 들어서 탈력 발작이 있는 환자가 와킥스를 먼저 써볼 순 있다"고 말했다. 탈력 발작은 항우울제로도 완화할 수 있다. 항우울제가 렘수면 중추를 억제해주는 덕이다.

1차 처방제는 아니지만, 환인제약의 '페니드(메틸페니데이트염산염)'도 가끔 처방된다. 중요한 회의가 있는 날 기면병 환자가 평소 먹던 약과 페니드를 함께 복용하면 정신을 더 또렷하게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의존성이 있는 데다 가슴 두근거림, 불안증 등 부작용이 있어 1차 치료제로 쓰이진 않는다.

기면증은 약물치료 못지않게 바른 생활 습관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제시간에 자지 않는 등 수면 습관이 불량하면 낮에 더 졸릴 수밖에 없어서다. 고대안산병원 김현진 교수는 "매일 밤 규칙적인 시간에 잠들고 낮에 적당히 낮잠을 자면, 약물치료만 할 때보다 주간 졸림증을 효과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기면병 특성 고려하지 않는 분위기와 제도 바뀌어야
다른 희귀질환과 마찬가지로 기면병도 해외에서만 사용 가능한 약이 있지만, 현재 국내에 도입된 약도 효과가 나쁘지 않다. 그럼에도 환자와 의사 모두 현재의 기면병 치료에 만족하기 어렵다. 우리나라는 신약 도입보단 문화와 제도의 개선이 더 시급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게 '낮잠'이다. 기면병 환자는 점심 후에 20~30분 정도 자고 일어나는 게 좋다. 남은 하루를 훨씬 명료한 정신으로 보내는 데 도움돼서다. 이에 정 교수는 "낮잠을 자면 약 0.5알을 먹는 효과가 있다"며 본인의 환자에게 꼭 낮잠을 꼭 자길 권한다. 그러나 사회생활을 하며 매일 같은 시간에 낮잠을 자기란 어려운 일이다. 학교나 직장 차원에서의 배려가 필요하다.



기면병 약과 항우울제를 복용해도 주간 졸림이나 탈력 발작이 계속되는 환자도 있다. 이런 환자들을 배려해, 특정 조건을 만족하는 기면병 환자는 장애 판정을 받을 수 있게 되어 있다. 문제는 장애 판정 기준이 기면병 환자의 특성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건복지부에서 고시한 '장애정도판정기준'에 의하면, 기면병 환자는 다양한 장애 유형 중 '정신 장애'를 판정받을 수 있다. 기면병이 있으면서 '정신병적 증상'이 동반되는 경우에 한해서다. 이것부터가 잘못됐다는 게 환자들과 의료계 입장이다. 정 교수는 "장애 판정 기준은 그 질병의 고유한 특성을 반영해 만들어야 하지만, 기면병 증상인 주간 졸림과 탈력 발작은 정신병과 전혀 관련이 없다"고 지적했다. 기면병 환자들은 주로 신경과에서 치료받으나, 고시에서 기면병을 '정신장애'의 하위 범주로 분류한 탓에 정신과 전문의만 장애 판정을 내릴 수 있다. 심각한 탈력 발작으로 일상생활이 어려움에도 정신 질환이 없다는 이유로 심사에서 탈락하는 환자가 많다.

비슷한 문제가 병역 면제 기준에도 나타난다. 현행 '병역판정 신체검사 등 검사규칙'이 제시하는 '질병·심신장애의 정도 및 평가 기준'에 의하면, 기면병 환자는 '6개월 이상의 치료에도 불구하고 증상이 잔존'하거나, '1개월 이상 기면증으로 입원력이 확인된 사람'일 때 5급(전시근로역) 판정을 받는다. 이 규정은 비현실적인 측면이 있다. 기면병 환자는 증상이 약하든 심하든 입원 치료를 거의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입원해도 더 시도해볼 수 있는 치료법이 있는 게 아니라서다. 정 교수는 "기면병은 일상생활을 하며 증상을 조절해나가는 게 중요하므로 입원치료가 별 의미가 없다"며 "20년간 기면증 환자를 진료해왔지만, 치료 목적으로 입원한 환자는 한 명도 없었다"고 말했다.

기면병 환자를 배려하기 위한 제도가 있음에도 환자들이 그 덕을 보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한국은 기면병에 관한 국가적 연구가 거의 진행되고 있지 않다. 치료받는 중인 환자 수가 약 5000명에 불과해 전수조사가 가능함에도 환자 현황조차 파악되지 않았다. 환자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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