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덕화는 1952년생으로 지난 1972년 MBC 5기 공채 탤런트로 발을 들이며 연기 인생을 시작했다. 데뷔 직후 트레이드 마크인 짙은 눈썹과 뚜렷한 이목구비, 특유의 반항적이면서도 와일드한 매력으로 단숨에 스크린을 장악하며 당대 최고의 '청춘스타'로 떠올랐다. 영화 '진짜 진짜 잊지마'를 시작으로 드라마 '한명회', '제5공화국', '대조영', '옷소매 붉은 끝동' 등 수많은 메가 히트작을 남긴 그는 탄탄한 연기력은 물론 예능 진행 능력까지 모두 갖춘 독보적인 '만능 엔터테이너'로 대중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한창 잘 나가던 최고의 전성기였던 1977년 4월, 그의 인생을 완전히 뒤흔든 참혹한 오토바이 사고가 터졌다. 버스와 충돌해 수십 미터를 끌려간 대형 참사로 그는 무려 50여 차례의 대수술을 받으며 사투를 벌여야 했고, 결국 장애 3급 판정이라는 가혹한 후유증을 얻었다. 설상가상으로 외아들의 날벼락같은 사고 소식에 큰 충격을 받은 그의 아버지이자 원로배우 고(故) 이예춘마저 병세가 악화되었고, 같은 해 11월 끝내 숨을 거두면서 이덕화는 감당하기 힘든 슬픔과 절망 속에 갇히고 말았다.
이처럼 인생에서 가장 어둡고 힘들었던 시기를 이겨낼 수 있었던 건, 당시 여자친구였던 지금의 아내 김보옥 여사의 헌신 덕분이었다. 당시 결혼은커녕 약혼조차 하지 않은 연인 사이였던 김 여사는 주변에서 모두 "이덕화는 끝났다"며 발길을 돌릴 때도 묵묵히 그의 곁을 지켰다. 자그마치 3년 동안 병실에서 숙식하며 그의 대소변을 직접 받아내는 눈물겨운 간호로 이덕화를 다시 일으켜 세웠고, 이 극진한 정성과 사랑에 감동한 그는 기적적으로 회복하자마자 평생을 함께할 결혼을 결심했다.
아내의 지독한 사랑 덕분에 암흑기를 이겨낸 그는 연예계에 복귀해 보란 듯이 제2의 전성기를 열었다. 이때의 고마움을 평생 잊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결혼 후 자신의 명의로 된 재산을 단 하나도 남기지 않은 채 모든 경제적 권한을 아내에게 전적으로 넘기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여러 예능을 통해 재산 대부분이 아내 이름으로 되어 있어, 자신은 오직 낚시하러 갈 때 미끼 값을 타 쓰는 게 전부라며 유쾌한 실상을 공개하기도 했다. 그는 과거 한 인터뷰를 통해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인생은 내 것이 아니라, 100% 아내가 만들어 준 인생"이라며 자신을 지탱해 준 아내를 향해 아낌없는 고마움과 애정을 표현했다.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요즘 연예계에서, 오랜 시간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준 이들 부부의 서사는 묵직한 울림을 준다. 모진 풍파를 다 이겨내고 늘 대중의 곁을 든든하게 지켜온 대배우 이덕화, 그의 뜨거운 연기 인생과 아름다운 동행을 변함없는 마음으로 응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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